설교의 본질이 희미해져 가는 시대, “설교는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정면으로 답하는 책이 출간됐다. <말씀이 일하시니>는 ‘설교자들의 설교자’로 불리는 **플레밍 러틀리지**가 2019년 베일러 대학교 신학대학원 ‘트루엣 파치먼 강좌’에서 전한 설교론 강연을 엮은 책이다.
러틀리지는 미국 성공회 최초의 여성 사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오랜 교구 사역과 세계 각지에서의 강연과 설교를 통해 깊은 신학적 통찰과 설교적 권위를 인정받아 왔다. 이 책은 그녀가 수십 년간 현장에서 체득한 설교의 본질을 집약적으로 담아낸 강연록이다.
설교는 ‘기술’이 아니라 ‘사건’이다
러틀리지는 설교를 단순한 종교적 위로나 수사적 기술로 축소하는 경향을 강하게 경계한다. 그녀에 따르면 복음 설교는 한 사람이 청중 앞에서 펼치는 퍼포먼스가 아니다. 설교는 설교자와 회중이 함께 참여하는 하나의 ‘작품’이며, 무엇보다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시는 사건이다.
이 책은 종교개혁 전통 위에서 “선포된 설교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학적 확신을 다시 강조한다. 복음 선포는 인간의 언어로 전달되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참된 지혜가 감춰져 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나타난 십자가의 ‘미련해 보이는’ 메시지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고백을 설교의 중심에 놓는다.
십자가 복음과 우주적 시나리오
러틀리지는 설교가 성경의 거대한 서사, 곧 하나님의 구속 드라마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신약성서와 포로기 이후 형성된 구약 본문들에 뿌리를 둔 묵시적 시나리오를 강조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우주적 전쟁과 하나님의 승리라는 틀 속에서 조망한다.
이는 설교를 단순한 도덕적 교훈이나 심리적 위로로 축소하지 않도록 돕는다. 설교는 중립적 공간에서 이뤄지는 담론이 아니라, 이미 다른 힘이 점령하고 있는 세상 한복판에서 선포되는 복음이다. 그렇기에 설교자는 자신의 기교나 카리스마를 신뢰하기보다, 역사하시는 말씀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설교자와 회중 모두를 향한 약속
이 책은 설교자를 위한 지침서이면서 동시에 회중을 향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러틀리지는 하나님이 설교자에게 주신 약속이 회중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졌음을 강조한다. 말씀을 전하는 자뿐 아니라 듣는 자 또한 ‘말씀을 들으라는 부름을 받은’ 존재다. 설교의 생명은 설교자와 회중 사이에 일어나는 설명할 수 없는 ‘연금술’과 같은 사건 속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인간의 손으로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며, 성령의 역사에 속한다.
급진적 겸손을 요청하다
러틀리지는 오늘날 교회가 설교를 지나치게 전략화하고 기술화하는 흐름을 비판한다. 설교자는 스스로를 드러내는 인물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증인이다. 인간의 재능이 아니라, 십자가의 말씀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급진적 겸손’이야말로 설교자의 핵심 태도라는 것이다.
<말씀이 일하시니>는 교파를 넘어 설교의 본질을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깊은 도전을 던진다. 목회자와 신학생은 물론, 복음 선포의 의미를 다시 붙들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설교가 왜 여전히 교회의 심장이어야 하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말씀이 일하신다는 확신이 사라질 때 설교는 기술이 되고, 복음은 메시지 상품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일하신다는 믿음이 회복될 때, 설교는 다시 사건이 되고 교회는 살아난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을 향해 독자를 초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