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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 거룩한 교제와 복음의 견고함

 

1. 거룩한 교제와 공동체의 중요성

로마서 16장 16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라고 말한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바울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보여주어야 할 거룩한 교제, 거룩한 인사를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입을 맞추는 행위 자체를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형제가 된 이들이 서로를 대할 때마다 참된 사랑과 깊은 영적 친밀감을 나누라는 권면이다.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교회 안에서 만나면 악수나 포옹 등을 통하여 반갑고 따뜻한 마음을 표현한다. 그러나 바울 시대의 교회, 특히 로마 교회에서는 입맞춤이라는 표현이 그 시대적인 맥락 속에서 자연스러운 '문안'의 표현이었고, '거룩하게'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 성결한 마음으로 서로에게 나아가야 한다는 강조점이 담겨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바울의 권면에 대해, 교회라는 공동체가 단순히 사람들의 집단이 아니라 한 몸(One Body)으로서 유기적으로 연결된 지체들의 모임임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즉, '오른손이 왼손을 모른다' 할 수 없고, '눈이 발의 수고를 잊을 수 없다'고 말하듯이, 교회는 지체들이 서로 돕고 연결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 교회를 향해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라고 할 때, 그 근저에는 바로 "너희가 이미 하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지체이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셈이다.

이어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 밝힌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사역하던 초대 교회 시대에도, 가시적으로 지중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었던 교회들이 서로를 완전히 모르거나 단절되어 지낸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된 복음이 사도들의 전도로 인해 안디옥, 소아시아, 마케도니아, 아가야, 로마 등으로 빠르게 확산되며 교회들이 세워졌다. 교회들은 서로 편지를 통해 소식을 나누고, 선교 헌금을 거두어 보내고, 사도나 동역자들을 파송하며 그 안에서 한 몸으로 결속되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초대교회가 보여주는 '연결'과 '연대'가 오늘날 교회들에게도 큰 시사점을 준다고 해설한다. 현대 세계의 교회들은 인터넷과 통신 수단의 발달로 훨씬 더 쉽고 빠르게 서로의 소식을 주고받고, 재정과 인력을 공유할 수 있다. 그런데도 정작 교회와 교회가 분열하고 담쌓기에 급급할 때가 많다. 고대보다 훨씬 나은 소통의 환경을 누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처럼 한 몸으로 함께 협력하고 돌보는 문화는 제대로 세워지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본문에서 바울이 본보기를 보여준 교회의 '연결성'과 '공동체성'을 우리가 깊이 회복해야 함을 뜻한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는 말씀에 담긴 진정한 함의는, 교회가 '거룩'이라는 성품을 입고 서로를 맞이하되, 그 안에 담긴 사랑과 보살핌, 하나됨의 의식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즉, 바울의 시대에는 이방인 출신과 유대인 출신이 함께 교회를 이루었는데, 이 두 무리는 율법과 전통, 문화, 언어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하게 서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는 요청은 차이와 장벽을 넘어서는 '환대'를 의미한다. 서로 다른 배경과 문화 속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됨을 잊지 말고 진실한 친교와 인사를 나누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해설하며, "교회 안에 그 누구도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회적 신분이나 배경이 다르다는 이유로, 혹은 제도권 교회와 비제도권 교회라는 형태가 다르다는 이유로,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 형제자매들을 외면하거나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거룩한 입맞춤, 거룩한 문안은 어떤 인위적 형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친밀감과 섬김의 태도를 기반으로 한 상호 돌봄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이렇게 교회가 서로를 향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인사를 건네는 모습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공동체의 본 모습이자 부름받은 성도들의 아름다운 표징이 된다.

바울은 거룩한 교제의 중요성을 상기시킨 뒤, 17-18절에서 교회 공동체의 순수함과 일치를 위협하는 요소, 곧 분쟁과 실족(거치게 하는 것)을 언급한다. 이는 앞선 말씀에서 나온 '서로 문안하라'는 교제의 기반을 지키는 데 있어 가장 주의해야 할 부분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고 바울은 말한다. 교회 안에는 분쟁을 일으키는 자와 다른 이들을 실족하게 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는데, 그들을 멀리함으로써 교회를 지키라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주석하며, 교회의 거룩한 교제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관계를 파괴하고 죄의 길로 이끄는 세력에 대해 분별하는 지혜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비롯하여 여러 지역 교회와 소통할 때, 항상 이단 사설이나 분열을 일으키는 무리들을 경계하도록 권면한 것은 초대교회의 공공연한 현실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교회가 어디든 완전히 순수한 천사들만 모인 곳이 아니라, 죄성을 가진 인간이 모인 현실 공동체인 만큼, 분쟁과 실족의 근거가 언제든 생길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결코 거기에 휩쓸리지 말라"라는 바울의 말을 유념해야 한다.

'분쟁을 일으키는 자'는 다툼과 갈등, 험담과 파벌을 조장하여 교회 안에 불화를 퍼뜨린다. 잠언 6장에서도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예닐곱 가지" 중 하나로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가 뽑힌다. 또 '거치게 하는 자'는 다른 사람의 신앙여정을 방해하거나 시험에 들도록 유혹함으로써 믿음을 넘어뜨리고자 한다. 바울은 이들을 '자기 배만 섬기는 자들'이라고 부르며,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 아니라 오직 자기 이익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 교묘한 말과 아첨으로 순진한 자들을 미혹한다고 말한다.

교회 공동체가 서로 건전하고 거룩한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바울이 말한 이런 대상들을 분별하고 적극적으로 멀리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사랑으로 모든 것을 덮되, 잘못된 행동과 영적 해악을 교묘히 끼치는 자들을 무조건 수용하는 것이 '참된 사랑'은 아니라고 언급한다. 즉,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태도가 오히려 교회를 병들게 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거룩함을 지키려면 바울이 말한 대로 "멀리하는 지혜"도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멀리하기 이전에, 가능한 한 권면과 교정을 시도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분쟁과 실족의 위험을 언급한 뒤, 19절에서 로마 교회의 순종이 널리 알려졌음을 언급하며 그들을 칭찬한다. 그리고 그 칭찬의 결론으로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한다. 이는 문맥상, 분쟁이나 잘못된 교훈에 휩쓸리지 말고, 오히려 선한 일에 더 탁월해지고 악한 일에는 덜 익숙하라는 뜻이다. '선한 데 지혜롭다'는 것은, 교회 공동체가 사랑과 봉사, 섬김과 같은 의로운 일에 능숙하고 지혜롭게 대응한다는 의미다. '악한 데 미련하다'는 것은, 죄나 분쟁, 사람을 쓰러뜨리는 계략 등에 대하여 무지에 가깝도록 관심을 두지 않고 빠져들지 않는 태도를 뜻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설교할 때, 현대 교인들이 "세상의 악과 유혹에 관한 지식은 넘치도록 많으면서도, 정작 선을 행하고 자비와 헌신을 실천하는 데에는 매우 서투른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특히 인터넷과 미디어를 통해 각종 범죄, 폭력, 분쟁, 음란, 부정직 등이 끊임없이 노출되면서 악한 일에 대한 정보와 자극은 넘쳐나지만, 이것을 대처하고 '선한 일에 더욱 지혜로워지는' 영적 태도는 훈련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로마 교회에게 준 이 권면,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는 말을 깊이 새기며, 악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다고 자부하기보다 오히려 악에서 물러나고, 선을 풍성히 체득하기 위해 훈련해야 한다.

20절에서 바울은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축복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교회가 분열과 실족을 이끄는 악한 세력, 즉 사탄의 간교한 공격으로부터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선포이자 확신이다. 지금은 사탄이 이 땅에서 활동하며 교회를 흔들 수 있으나, 결국 평강의 하나님께서 그의 권세를 꺾어 교회가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평화를 누리게 하실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놓고, 많은 성도들이 교회 안팎의 갈등과 시련, 시험을 경험할 때마다 "도대체 언제 이 혼란이 끝날 것인가?" 하고 질문하지만,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은 "속히" 사탄을 상하게 하실 것이며, 인간적으로는 요원해 보이는 갈등도 결국은 해결될 수 있다고 해설한다. 그러나 그 "속히"라는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의 육적인 감각으로 재단할 수 없는 주권적 시간(kairos)이다. 그때까지 교회 공동체는 거룩한 교제 안에서 서로를 세워주고 불화하는 자나 미혹하는 자들에게 휩쓸리지 않으며, 더욱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2. 분쟁, 시험 그리고 복음의 견고함

로마서 16장 21절 이하에서 바울은 자신의 동역자들을 언급한다.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라고 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그 편지를 쓰고 있던 현장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그는 고린도에서 로마에 있는 교회들에게 글을 보내고 있었고, 함께 있던 이들의 이름을 기록하여 로마 교회에 전한다. 디모데는 바울이 매우 아끼고 신뢰했던 영적 아들로서 빌립보교회를 비롯해 여러 교회를 돌볼 때 바울이 자주 파송했던 인물이다. "내가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다"(빌 2:20)는 유명한 바울의 평가를 통해서도, 바울과 디모데의 긴밀한 관계를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언급하며, 교회의 분쟁과 시험을 해결하거나 예방하는 데 "동역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한다. 만약 바울이 혼자서만 사역했다면,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생긴 갈등, 고린도교회의 문제, 갈라디아지역의 율법 논쟁 등 다양한 이슈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디모데나 누가, 실라 같은 이들이 바울의 빈 자리를 채워가며 교회를 돌보고, 위로하고, 필요한 헌신을 감당함으로써 바울의 사역은 더 넓은 지역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교회는 분명 한 몸이면서도, 여러 지체가 각각 자기 기능을 담당할 때 그 전체가 온전히 서게 되는 것이다.

이어지는 "나의 친척 누기오, 야손과 소시바더"의 언급을 보면, 여기에는 바울의 포용성과 국제적인 감각이 스며 있다. 야손은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을 영접하고 보호했다가 오히려 고발당해 벌금을 물었던 인물로 유명하며(행 17장), 소시바더는 베뢰아 출신으로 바울과 함께 여러 지역에서 복음을 전한 자로 본다(행 20장). 이러한 동역자들의 이름이 언급될 때, 바울은 곁에 함께 있는 이들이 동일한 마음으로 로마 교회에게 문안한다고 밝힌다. 이는 교회가 특정 사도나 리더의 독립적인 사역체가 아니라, 실제로 각 지역 교회의 구성원들이 보이지 않게 연대하고 협력하는 '네트워크'였음을 보여준다.

22절에서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라고 하는 구절을 통해서는, 로마서가 바울의 구술을 토대로 대서(代書)하던 더디오에 의해 쓰인 사실이 확인된다. 바울은 눈이 좋지 않았다는 견해가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되곤 하는데, 갈라디아서 6장 11절에서는 바울이 직접 큰 글자로 기록했다고 언급하기도 한다. 당시에는 전문적으로 글을 기록해주는 대서자가 필요했고, 바울은 자기의 복음적 사상을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종종 이러한 대서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바울이 직접 손으로 인사를 적거나, 혹은 대서자가 자기 이름을 기입함으로써 편지가 완성되곤 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설명하며, 비록 대서라는 역할이 겉으로 보면 사도 바울이라는 거대한 인물의 뒤편에 가려진 '조역' 같아 보일 수 있지만, 사실상 성령의 감동을 전달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주목한다. 이들은 단순히 받아쓰는 사람이 아니라, 본문의 의미와 메시지를 온전히 이해하고 충실히 기록하여 원활한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는 사역자이기도 했다. 또 교회사는 이처럼 '이름을 내세우지 않는 동역자들'의 헌신을 통해 발전해왔다. 이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역할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충성을 절대로 잊지 않으신다"고 강조한다. 교회 안에서 분쟁이 일어날 때, 대개 빛나는 자리나 명성을 쫓는 이들이 갈등을 야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겸손히 뒤에서 섬기는 자들이 오히려 교회를 든든히 지탱하는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23절에는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이오는 고린도전서 1장에서도 언급된 인물로, 바울이 고린도에서 세례를 준 몇 안 되는 성도 중 하나였다. 또한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라는 표현을 보면, 고린도라는 도시에서 실제 정치적·행정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여 교회에 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아마도 당시 도시 재정을 관할하는 역할을 맡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교회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결코 유리된 집단이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두고, 교회가 전도와 선교를 통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품었음을 상기시킨다. "모든 민족이, 모든 계층이"라는 복음의 포괄적 비전을 초대교회가 이미 부분적으로 실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회적 고위층에 속한 사람부터 낮은 신분에 속한 사람, 유대인부터 헬라인, 로마 시민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모습은 초대교회가 지니고 있던 위대한 통합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다양성은 교회 안에 분쟁의 씨앗이 되기도 쉬웠다. 율법 준수 문제나 이교 문화와의 충돌, 경제적 불평등 등의 이유로 갈등이 생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바울은 반복적으로 "서로 받아주라, 서로 섬기라, 분쟁을 일으키지 말라, 실족하게 하지 말라"라고 가르치는 한편, 위에 언급한 분별력과 멀리해야 할 대상에 대한 언급도 함께 했던 것이다.

24절(개역개정 성경에는 24절이 생략되거나 23절과 연결되어 있는 판본도 있다)을 거쳐 마지막 25-27절에서는 로마서를 마무리하는 바울의 장엄한 송영이 펼쳐진다. 바울은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라며, 이 복음이 '계시된 하나님의 신비'임을 선포한다. 구약 시대 수많은 예언자들이 "언젠가 올 것이다"라고 예고했던 메시아 구원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히 드러나고 실현되었다는 선언이다.

장재형목사는 로마서가 결론부에서 이처럼 긴 영광송(doxology)으로 끝맺는 이유가, 본 서신의 주제인 '복음의 깊이와 넓이'를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복음은 그저 한 종교의 교리가 아니라, 우주적인 구원 계획이며 하나님의 오래된(영세 전부터) 비밀이 마침내 드러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이 비밀을 밝히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궁극적인 목적은 세계 모든 종족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순종하며 구원에 참여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26절에서 말하는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의 예언과 율법을 완성하신 분임을 의미한다. 예언자들이 기대했고 갈망했던 그 구원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성취되었다. 그리고 그 복음은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해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다. 교회가 이 복음을 선포하는 이유, 분쟁과 시험을 극복해야 하는 이유, 거룩한 교제를 지키는 이유도 결국은 이 영광스러운 복음 사역을 온전히 전 세계에 펼쳐나가기 위해서다.

바울은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이라고 선언한다. 곧 복음이야말로 교회와 성도를 지탱하는 '반석'이라는 점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상과 이념, 철학과 문화가 있겠지만, 교회를 흔들림 없이 붙드는 힘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그 복음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랑, 의, 능력이다. 교회 공동체가 분쟁이나 시험으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이 복음을 붙듦으로써 굳게 설 수 있다고 바울은 확신한다. 그리고 27절에서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며 서신을 마무리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결론부에 대해, 바울이 교회 안에 있는 여러 위험을 지적하고, 다시금 교회의 영광스러운 소명을 상기시키며, 마침내 그 모든 것의 본질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흐름이 "신학적 심포니"와 같다고 표현한다. 교회의 목표는 자기 보전이나 단순한 확장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영광을 드러내는 방식은 그리스도를 전파함으로, 교회를 든든히 세움으로, 모든 민족을 믿어 순종케 함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로마서가 마무리되는 흐름 속에서, 교회가 분쟁 없이 하나 되어 서로 거룩한 교제를 나눌 때, 세상이 알지 못하는 복음의 견고함이 빛을 발한다.

로마서 16장 16-27절은 우리에게 '교회의 교제'와 '교회의 분별', 그리고 '복음의 견고함'을 종합적으로 제시한다.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는 바울의 말씀은 교회 안에서의 깊은 사랑과 영적 친밀감을 상징한다. 반면,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를 경계하고 멀리하라는 권면은 교회 순결과 성장을 위해 필요한 단호함과 분별력을 촉구한다. 그리고 마지막 "평강의 하나님께서 사탄을 상하게 하시리라"는 선언과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이라는 축복은, 교회가 종국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 안에서 서게 되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장재형목사는 현대 교회가 이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여전히 분쟁의 화살이 교회 공동체를 공격하고, 서로를 실족시키는 거짓 가르침이 들어오는 상황에서, 더욱더 복음의 견고함 위에 서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가 사회적으로 비판을 받고 내부적으로 시험에 빠질 때, 결국 답은 자기 방어가 아니라 '복음' 그 자체라는 것이다. 바울이 말했듯이,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유일무이한 능력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복음적 가치를 잃어버린 채 세속적인 이득이나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면, 반대로 교회를 파괴하는 분쟁과 갈등이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또한, 장재형목사는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라"는 말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주일 예배 때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성도 간 교제와 돌봄이 깊어져야 하며, 말씀 연구와 나눔을 통해 선을 함께 추구하고 악을 분별하는 영적 감각을 키워야 한다고 제안한다. 교인들이 서로를 아끼고 신뢰하게 될 때, 분쟁이나 거짓 가르침이 들어온다 할지라도 쉽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로마 교회를 비롯해 바울이 세웠던 여러 교회들이 서로 문안하며 안부를 전하던 모습은 단순한 예의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들에게 '안부를 전한다'는 것은, 곧 '우리는 한 몸이고, 함께 기도하고 협력하며 살아간다'는 상호 인정의 표현이었다. 현대 교회에서도 이 정신을 계승하려면, 교단과 교파, 혹은 지역과 국가 간의 벽을 넘어서서 함께 예배하고 함께 선교할 수 있는 협력의 장이 넓어져야 한다. 우리는 단지 친교행사나 회식 자리에 모이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서로가 격려가 되고, 필요한 때에 물질적 지원이나 인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가져야 한다.

이처럼 로마서 16장의 결말부는, 교회에 내재한 위험(분쟁, 시험 등)을 피하지 않고 솔직히 지적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해낼 수 있는 근본 동력을 '복음'에서 찾고 있다. 결국 복음이야말로 교회를 근원적으로 새롭게 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본래의 모습, 곧 거룩하고 하나된 공동체로 돌아가도록 만든다. 분쟁은 복음을 상실한 자리에서 자라나고, 거짓된 가르침은 복음의 본질을 왜곡함으로써 힘을 얻는다. 그러나 교회가 복음 안에 굳게 선다면, 어떤 공격이나 유혹도 '평강의 하나님'께서 몰아내실 것이며, "너희 발 아래에서 사탄을 상하게 하시리라"는 약속이 현실이 될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본문의 맥락을 신앙 공동체가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하며, 교회가 분열과 미움에 빠져 있을 때, 밖에서 복음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이 교회 안의 혼란과 다툼을 목격하고 실망을 겪게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화목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교회는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회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만일 교회 자체가 화목을 저버리고 항상 분쟁이 가득하다면, 세상이 어찌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고,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바울이 말하는 '분쟁을 일으키는 자'와 '거치게 하는 자'를 엄히 경고하는 것은,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아주 근본적인 문제인 셈이다.

교회는 '거룩한 입맞춤'으로 상징되는 화목한 교제의 공동체이면서도, '분쟁을 일으키는 자'를 분별하여 멀리해야 하는 공동체다. 이 두 측면은 결코 상반되지 않는다. 한편으로 우리는 서로 사랑과 용납, 환대를 베풀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거짓된 가르침이나 분쟁 유발 세력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이것은 과거 초대교회나 바울 시대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지침이다. 교회가 이 원칙을 올바로 실천할 때, 바울이 결론에서 역설하는 '복음의 견고함'이 그 공동체 가운데 크게 빛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는 말씀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진리를 상기시킨다. 복음이 인생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세우는 능력이 되는 것도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분열과 갈등을 넘어서서 하나 됨을 이루게 하시고,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부름 받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께 영광을!"이라는 고백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분명히 하며, 복음에 충실하고 서로에게 충성된 모습으로 세상 앞에 서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처럼 로마서 16장의 마지막 권면이 오늘날의 교회들, 그리고 성도들에게도 매우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한다고 보며, 교회는 여전히 분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세상 문화와 충돌하며 믿음을 흔드는 유혹이 도처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공동체 안에서는 거룩한 교제와 상호 보살핌, 섬김을 통해 분열의 틈이 생기지 않도록 힘써야 하며, 교회를 무너뜨리고 시험에 빠뜨리는 것들을 분별하여 경계해야 한다. 동시에,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라"는 바울의 요청을 마음에 새기고, 삶의 매 순간 복음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영적 훈련이 필요하다. 교회가 이러한 길을 갈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평강의 하나님이 사탄을 상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히 임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로마서 16장 16-27절은 교회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본질적인 모습을 제시한다. 교회 안에서의 거룩한 교제와 환대, 분쟁을 예방하고 실족시키는 자를 경계하는 분별력, 그리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복음의 견고함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지향점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통해, 교회가 분열 대신 거룩한 하나됨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복음의 능력 안에 있으며, 우리가 악한 데서 멀어지고 선한 데 가까이 갈수록 결국에는 평강의 하나님께서 교회를 평강으로 이끄신다는 해설을 제시한다. 이 메시지는 지금도 유효하고,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비칠 것인지를 가늠하게 하는 지표가 된다.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은 거룩함, 화목, 그리고 복음을 통한 견고함에 달려 있으며, 이것이 바로 오늘을 사는 성도들이 붙들어야 할 진리다. 이러한 가르침을 늘 기억하며, 교회가 한 몸으로 함께 서서 세상과 자신을 돌아볼 때,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돌아가는 위대한 구원의 드라마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이상으로 우리는 로마서 16장 16-27절의 본문을 두 개의 소주제, 즉 (1) 거룩한 교제와 공동체의 중요성, 그리고 (2) 분쟁, 시험 그리고 복음의 견고함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바울은 단순히 교회에 잘 지내라는 덕담을 남긴 것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재확인하고, 그 사명을 가로막는 분쟁과 거짓 가르침을 경계하며, 궁극적으로는 복음에 뿌리내린 견고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듯, 교회가 이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분별력과 사랑, 섬김을 겸비한다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교회를 보호하시고, 교회를 통해 세상에 복음이 더욱 확산될 것이다. 이는 바울 당시뿐 아니라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진리이자 소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교회와 모든 성도에게 충만하기를, 바울이 그토록 원하였던 거룩한 교제와 하나됨이 우리 공동체 안에서 깊어지길 소망해 본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