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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자유 - 장재형목사

 

1. 죄의 연대성과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로마서 6장 1-11절에 대한 본문의 중요한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로마서 5장과의 긴밀한 연결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연관성에 대해 자주 강조해 왔는데, 특별히 죄의 연대성과 대표이론을 다루는 로마서 5장의 주제는 로마서 6장으로 넘어가는 성화의 논의와 긴밀히 이어지기 때문이다. 로마서 5장에서 우리는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에게 죄가 전가되었다는 사실을 배운다. 이는 흔히 말하는 원죄의 문제이고, 그 결과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성을 지닌 상태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아담은 본래 하나님의 복을 온 인류에 나누어 주는 '복의 통로'가 되어야 했으나, 타락을 통해 죄와 죽음을 가져다 준 인류의 대표가 되었다. 이 대표성(Representation) 혹은 연대성(Solidarity)은 성경 곳곳에서 나타난다. 예컨대 구약에서 아간이 범죄하였을 때 이스라엘 전체가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를 경험했던 일, 또 모세가 전장 뒤편에서 손을 들고 기도할 때 여호수아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일 등이 모두 한 사람의 행동이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연대성의 원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죄의 연대성 개념이 결코 과거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 공동체와 성도들의 삶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강조한다. 신약에 와서 바울 사도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가르치고자 한 내용도,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지만,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가 전가되는 반전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죄가 아닌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고, 우리는 그 의를 힘입어 죄가 아닌 은혜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결과 로마서 5장 후반부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선언이 나오는데, 바울은 여기서 죄의 권세보다 훨씬 크고 영원한 은혜와 의의 왕권을 찬양한다.

이렇게 구원이 오직 은혜에 기초하며, 아무리 큰 죄라도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안에서 사함받을 수 있다는 복음의 진리는 마치 자유의 획득과도 같다. 그러나 이때 종종 오해가 일어나는데, "그렇다면 죄가 많을수록 그만큼 은혜도 커지니 죄를 더욱 지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극단적인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바울은 이 질문을 이미 예상하고 로마서 6장 1절에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라고 묻는다. 그리고 2절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단호하게 답한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도적으로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이미 우리의 존재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달라졌기 때문에, 여전히 죄에 붙들려 사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칭의와 성화의 구분"을 명료하게 짚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칭의는 신분의 변화로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단번에 이루어지는 구원의 사건이다. 이는 죄의 형벌로부터의 해방이며, '원죄'가 해결되는 차원이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뒤에도 우리의 '상태'는 여전히 성령의 능력과 말씀의 조명을 통해 서서히 변화되어 가야 한다. 이 지속적인 과정, 곧 우리의 일상에서 나타나는 죄성(자범죄)과 싸워가는 과정이 바로 성화다. 믿는 자라 해도 순간순간 넘어지고 실수하며 죄의 유혹을 받을 수 있지만,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정죄에서 해방된 자들이기 때문에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죄에 매여 종노릇할 수 없다.

바울은 로마서 6장 3-4절에서 세례를 예로 들며,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그와 함께 다시 살아난다는 상징을 설명한다. 세례는 물속에 완전히 잠겼다가 다시 나옴으로써, 과거의 모든 죄와 옛 삶은 죽었고,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났음을 드러내는 의식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세례의 의미가 단순히 의식적·형식적 예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마음으로 믿는 성령의 세례가 앞서서 일어나야 한다고 가르친다. 마음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부활을 받아들여 참된 변화를 경험해야 하며, 물세례는 그 내적 변화를 확증하는 표지로서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어서 로마서 6장 5절 이하에서 강조되는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될 것"이라는 구절의 핵심을 하나의 '새로운 법의 지배로의 이동'이라 해석한다. 과거 우리는 아담 아래서 죄의 법과 죽음의 권세에 지배를 받았으나, 그리스도와 연합한 이후에는 의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 그리고 사랑의 권세 아래로 들어갔다. 이 새로운 지배 아래 사는 자는 이전처럼 죄가 왕 노릇할 수 없는 구조 속에 놓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에서 믿음 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의 '옛 습관'이 계속해서 우리를 붙들고 늘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는 곧 칭의 이후에도 남아 있는 자범죄 혹은 죄의 흔적 때문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정규전은 이미 이겼지만, 소탕전은 아직 계속되고 있는 상태"에 비유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승리, 곧 사단의 머리를 깨뜨리신 우주적 차원의 승리는 이미 결정되었으나,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에서는 소탕전이 남아 있다는 설명이다. 이 소탕전이 바로 성화의 여정이다. 성도가 매일매일 죄에 대해 민감하게 깨닫고 회개하며,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조금씩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변화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이 소탕전을 가능케 하는 동력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여기서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성령을 강조한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항상 새롭게 깨닫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거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증해 주실 때, 죄를 멀리하려는 마음, 죄를 두려워하는 마음, 동시에 죄를 넘어설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공급된다.

종합하자면, 로마서 6장은 로마서 5장의 죄의 연대성,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 그리고 은혜의 통치를 노래한 흐름 위에 서 있다. 바울은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는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선언한 직후, 이 은혜의 복음을 오해하여 죄를 방치하거나 죄에 안주하려는 태도를 경계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그의 몸된 교회에 연합된 존재라면, 이미 죄에 대해 죽고 의를 향해 살아난 자들답게 거룩을 향한 성화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부분을 거듭 강조하며, "우리가 이미 예수와 함께 죽은 자요, 다시금 살리심을 받은 자"라는 사실이 실제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여기서 교회 공동체의 중요성도 부각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도는 그 몸의 지체이기에 죄가 공동체 속에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면 함께 회개하고 돌이키는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죄의 연대성은 개인적 범죄도 공동체 전체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로서 서로 사랑과 거룩에 이르도록 격려하고 돌봐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장재형 목사는 이처럼 죄와 은혜, 진노와 사랑이라는 복음의 양면을 균형 있게 가르칠 때, 교회는 비로소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는 공동체로 설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부활한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을 바로 이해하는 데 있다.

이제 이러한 큰 틀을 가지고, 로마서 6장 1-11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세례와 연합, 그리고 실제 성도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실이 세례라는 예식을 통해 공적으로 선포되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본문의 첫 번째 핵심이라면, 두 번째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고 살아난 우리가 실제 삶에서 죄를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로마서 6장 11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했을 때, 이는 단순한 정신적 암시나 자기최면이 아니라 실제 영적 사실에 기초한 삶의 태도 전환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왜 여전히 죄의 유혹이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육체와 이 세상 환경, 그리고 사단의 계속되는 방해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우리의 신분은 이미 달라졌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는 사실이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거듭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단어로 풀어낸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에 대해 단번에 해방을 얻었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로 초청받았다. 그 결과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동기나 가치 기준도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 수 있는 새로운 근거 위에 서게 되었다. 그래서 회개와 성화가 가능한 것이며, 그것이 칭의 이후 반드시 뒤따르는 과정이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 죄와 은혜의 대결, 그리고 죄의 연대성에서 은혜의 연대성으로의 이동이 로마서 5장에서 6장으로 이어지며, 칭의받은 성도가 왜 성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세례의 의미 안에서,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난 자로 자기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그 새로운 정체성의 힘을 힘입어 죄와 싸우고 거룩을 추구하는 길로 부름받았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진리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올바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래야 은혜를 방종의 기회로 삼는 무질서가 아니라 감사와 거룩의 능력으로 승화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2. 그리스도와의 연합, 세례, 그리고 성령에 의한 성화

앞서 살펴본 대로 바울은 로마서 6장 3-4절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을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제시한다. 장재형 목사는 세례가 바로 이 연합의 표지이자,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어옴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예식이라는 점을 여러 차례 설교에서 강조해 왔다. 유대인 전통에서도 이교도가 유대교 신앙을 받아들일 때 세례를 행했는데, 완전히 물속에 몸을 담갔다가 나옴으로써 과거의 더러움은 씻고 새로운 존재로 태어남을 상징했다. 같은 맥락에서 기독교 세례 또한 물의 상징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났음을 공표한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세례는 단순히 물에 몸을 담그는 외적 의식만이 아니라, 마음에서 먼저 일어나는 '성령 세례'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즉 성령께서 우리 심령을 불로 태우시고 말씀의 진리로 씻어 주실 때,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 '나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내적 성령 세례가 일어날 때 삶의 동기가 변화하고, 죄를 향했던 방향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돌아서게 된다. 이후 물세례는 그 내면의 변화를 교회 공동체와 세상 앞에 선포하는 공적 예식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연합'의 신비가 로마서 6장에서 매우 깊이 있게 다루어진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었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 단번에 죽으셨고, 이제는 다시는 죽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살아 계신 것처럼, 우리도 죄에 대해 죽은 자요 하나님께 살아 있는 자로 여기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을 신학적으로 "실재적 연합"(Real Union)이라 칭한다. 신자와 그리스도는 단순히 사상적·관념적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실제 영적 유기체가 되었고, 그래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Body of Christ)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과거의 죄와 완전한 단절을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는 표현은 도식적인 비유가 아니라, 우리의 옛 사람(Old Man)이 실제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매장되었다는 영적 진리를 가리킨다. 그렇기에 성도는 '이미' 죄의 형벌과 권세에서 해방되었으나, '아직' 육신에 남아 있는 죄의 습관, 세상과의 관계에서 오는 유혹, 그리고 사단의 공격과 맞서 싸워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과정을 설명할 때 "정규전은 끝났지만, 아직 소탕전이 진행 중"이라는 비유를 자주 든다. 정규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미 결정적 승리가 확정되었고, 사단은 근본적으로 패배했으나, 여전히 역사 속에서 남은 잔재 세력을 통해 우리의 일상을 괴롭히려 시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탕전은 결코 결과를 뒤집을 만한 싸움이 아니라, 이미 승리가 보장된 전쟁의 마무리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소탕전에서 힘을 얻을 수 있는가?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전하는 것처럼,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우리 안에서 친히 탄식하며 기도하시며,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도록 인도하신다. 장재형 목사도 이 부분을 강조하면서, 오직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열어 주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가슴 깊이 새기게 하심으로써 죄와 거짓된 습관을 떨쳐 낼 수 있다고 역설한다. 이때 성령은 말씀의 검을 통해 일하시는데,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하도록 이끄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새삼 풍성히 알게 하여 죄를 멀리하게 만든다.

성화의 삶이란, 장재형 목사가 누차 언급했듯,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된 구원을 바탕으로 실제 현실 속에서 내 삶을 정돈해 가는 일이다. 이때 우리는 죄의 기억이나 옛 습관이 다시 우리를 끌어당길 때마다, "그것은 이미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매일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격려하며, 회개하고, 다시금 복음의 은혜를 확인하면서 우리는 조금씩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또한 여기에서 '소속감'과 '정체성'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교회 안에 공식적으로 편입된 존재가 되는데, 이것은 곧 왕이신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즉 더 이상 세상의 왕, 죄의 세력, 사단의 지배 아래 있지 않음을 확인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죄가 유혹해 올 때마다 우리는 "너는 이미 나의 주인이 아니다. 나는 다른 주, 곧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다"고 대답할 수 있다. 이는 하나의 '영적 주권 선언'이라고 할 수 있고, 이 선언을 가능케 하는 근거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바울은 로마서 6장 9-10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죄에 대해 단번에 죽으셨고, 이제는 생명 가운데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반복 확인하는 대목인데, 11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로 귀결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이것이 단순한 명령이나 권면이 아닌,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인정하라'는 의미로 해설한다. 다시 말해, 신자가 이미 실제로 가지고 있는 영적 신분과 자격을 삶 속에서 적용하고 누리라는 것이다. 만약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여전히 죄의 노예처럼 산다면, 그것은 오히려 모순이요, 복음이 주는 자유와 은혜를 스스로 포기하는 셈이라는 것이다.

성화의 과정에서 우리가 자주 빠지는 오류 중 하나는, '아직 남아 있는 죄의 흔적'을 보면서 자꾸만 자신을 죄인으로 정죄하고, 칭의의 확신 자체를 흔들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자신의 약함과 갈등을 솔직하게 고백하면서도("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라는 내용 등), 로마서 8장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위대한 선언을 선포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바로 복음의 역설이자 능력이라고 한다. 우리는 여전히 넘어질 수 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고, 이제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 생명 가운데 산다"는 고백을 통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이는 '값싼 은혜'나 '죄에 대한 방임'을 조장하는 교리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죄와 구별되는 거룩한 삶을 추구할 수 있는 '힘과 동기'를 제공해 준다. 죄책감이나 율법적 두려움에서 비롯된 노력으로는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이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하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그분의 거룩에 참여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나아가는 삶은 질적으로 다르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복음으로 말미암은 성령의 열매"라고 부른다. 복음이 우리의 속사람을 변화시키고, 그 사랑에 감사와 감동을 느낄 때 비로소 우리는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게 된다.

나아가 이러한 삶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죄를 돌아보고, 또 회개할 수 있도록 격려하며, 함께 기뻐하고, 함께 성장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하면서, 한 지체의 아픔이 전체의 아픔이고, 한 지체가 받는 영광이 전체의 영광이라고 말한다. 로마서 6장과 7장에서 나타나는 바울의 개인적 고민 역시 결국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다. 신자는 결코 혼자 독립적으로 죄와 싸우고 성화를 이룰 수 없다. 말씀과 성령이 함께 역사하는 자리, 즉 교회 공동체가 있을 때, 개인은 진정한 의미의 성화를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장재형 목사는 "개인의 구원체험이 교회라는 연합체와 무관하게 진행될 수 없으며, 세례를 받은 후에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통해 서로 격려하고 책망하며 함께 자라나야 한다"고 거듭 말한다.

로마서 6장 1-11절에서 배우는 핵심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자로 여기라'는 가르침이다. 이것은 우리가 겉으로만 예수를 믿는다 고백하는 것을 넘어, 실제로 죄를 바라보는 태도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태도, 그리고 이웃을 대하는 태도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근거가 된다. 이 변화는 결코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으며, 성령을 통해 계속 빚어져 가는 과정을 거친다. 장재형 목사는 성도가 의의 길에 들어서고도 넘어지거나 고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가 돌이킬 수 있는 근거는 "우리의 옛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이며,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살게 되었다"는 영적 진실이다.

장재형 목사는 또한 이 진리가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실존적 자유'를 선물한다고 말한다. 세상의 수많은 가치관과 유혹, 욕망이 우리를 끌어당길 때, 우리는 더 이상 그것에 매이거나 끌려다닐 필요가 없다. 이미 우리는 다른 통치자, 곧 사랑과 은혜와 거룩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이 통치자 안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섬기고, 세상에 대하여 사랑의 통로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즉 로마서 6장은 신자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정체성과 소명을 확립해 주는 장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장재형 목사는 이 교훈을 "미래 지향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 중 한 예로, 요한복음 9장에서 제자들이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고 "누구의 죄로 인함입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그것이 과거가 아니라 '미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 성화, 그리고 새로운 삶의 모습은 과거의 죄와 허물로 뒤엉킨 상태에서 건져 올려진 것이지만,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우리의 시선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영광스러운 종말론적 완성,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으로 향해야 한다. 로마서 8장 23절에서 "우리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고 했을 때, 이것은 장래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완성을 말한다.

로마서 6장 1-11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핵심 진리는 칭의와 성화, 죄와 은혜,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종합적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담 안에서 시작된 죄의 연대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뒤집히고, 우리는 이제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으로, 사망의 지배 아래가 아니라 생명의 성령의 지배 아래로 옮겨진 존재다. 그러므로 '죄에 거하겠느냐'는 질문에 답은 명백하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는 더 이상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힘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날 성도들이 이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세례가 의미하는 바를 실제 삶에서 재확인하기를 촉구한다. 세례로 공표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구원의 기쁨을 나누고, 서로의 연약함을 감싸 주며, 동시에 성령의 열매를 맺어 가는 과정 속에서 현실화된다. 이것이 없으면 세례는 그저 한 번의 종교의식으로 끝나고 만다. 하지만 성령께서 날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을 되살려 주실 때, 우리는 점점 더 '죄에 대해서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해서 살아 있는 자'로서의 자유와 기쁨을 체험하게 된다. 그 자유와 기쁨은 또한 다른 사람들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도록 초청하는 선교적 동력이 된다.

로마서 6장 1-11절의 강해를 통해 강조되는 바는 이중적이다. 하나는 죄의 연대성과 대표이론이라는 구약적·보편적 원리가 신약시대에도 유효하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모든 죄의 형벌이 해결되었고,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 의와 거룩의 길을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칭의의 확고부동함을 붙잡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화의 길을 실제로 걷는 것, 이것이 크리스천의 전 삶에 걸쳐 계속되어야 한다. 장재형 목사가 여러 설교와 글에서 되풀이해 말하듯, "과거에 매여 있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미래의 영광과 현재 주어지는 은혜에 눈을 뜨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찬양하며, 동시에 그 은혜를 악용하는 방종을 경계하고, 거룩한 삶을 지향하게 된다.

로마서 6장 1-11절에서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해 죽은 자로 선포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예하게 된 새 생명 가운데 사는 자임을 깨닫는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 현실이라면, 우리는 자신을 죄에게 내어줄 필요가 전혀 없다. 오히려 회개와 은혜의 능력을 통해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면서 죄를 극복하는 길을 걸어가는 존재가 되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 과정을 두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 날마다 부활 생명에 참여하는 삶"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매일매일의 작은 전투, 소탕전을 통해 우리의 옛 사람은 더욱 쇠퇴하고, 새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강건해지는 것이다. 이는 개인과 공동체를 넘어 세상에 대한 증언으로 이어지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도의 삶의 목적에 부합한다.

로마서 6장 1-11절 강해에서 핵심은 "죄를 벗어버리는 것과 은혜를 악용하지 않는 것" 사이의 균형을 바르게 세우는 것이다. 죄를 멀리하되 율법적이고 형식적인 강박감에 빠지지 않고, 은혜를 누리되 방종에 빠지지 않는 길,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가능해진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진정한 복음은 죄인을 죄인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동시에 죄인을 정죄만 하는 율법주의도 배격한다. 죄인을 의롭다 하시고, 그 의롭게 된 자를 실제로 의로운 모습으로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묵상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어주시는 성령의 역사에 근거한다. 바울이 로마서 6장 11절에서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이루어진 구원의 확실성에 뿌리를 두기 때문이다. 이 확실성이야말로 성도가 세상에서 죄와 싸우며 거룩을 추구하는 길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장재형 목사가 줄곧 설교와 강해를 통해 전해 온, 로마서 6장 1-11절이 주는 교훈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