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션

그리스도의 고난 - 장재형목사

 

1.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랑의 본질우리는 사순절 기간 동안 그리스도의 고난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특히 요한복음 13장부터 19장까지를 고난 주간에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난의 의미가 얼마나 깊은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 전통에서 사순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되새기는 시간으로 설정되어 왔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고난'이라고 하면 그것을 저주나 심판으로만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러 곳에서 고난이 때로는 하나님의 훈련이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십자가의 길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장재형목사 역시 여러 설교와 가르침에서 "고난이야말로 사랑을 깊이 체험하게 하는 중요한 통로"라고 언급하며,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강조한 바 있습니다.

왜 우리가 고난을 이해해야 하고, 왜 고난을 피상적이 아니라 깊이 있게 묵상해야 할까요? 성경은 그 답을 명확히 제시합니다. 고난은 저주가 아니라 사랑임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영원한 생명을 알 수 없고, 고난을 통해 드러나는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믿음과 소망 역시 그 뿌리를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라고 말했습니다. 믿음과 소망이 중요하지만, 그 사랑으로 인해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지며, 그 사랑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에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길이야말로 부활의 영광을 목도하는 지름길"이라고 설파해 왔습니다. 결국 사랑으로 말미암은 생명, 즉 영생이야말로 고난을 통해 열리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과 세상을 돌아보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난 자체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며 피하려고만 합니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는 3D(Dirty, Difficult, Dangerous)라 불리는 직종들을 기피하는 분위기가 오랫동안 형성되어 왔고, 부모들은 자식이 고생을 겪지 않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고난을 무익하게 자초하는 것은 물론 피해야 하지만, 젊어서 고생을 사서도 한다는 옛말이 전하는 바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이는 고난이 때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성숙의 과정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성경은 고난을 통해 배우는 유익에 대해 분명히 말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 119편 67절과 71절에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5장 3절 이하에서도 사도 바울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하며 고난이 어떻게 우리의 인격과 믿음을 단련시키는지를 상세히 말합니다.장재형목사는 여러 강론에서 로마서 5장의 이 대목을 자주 인용합니다. 환난과 고난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고난의 터널로 들어갈 때, 주님의 사랑과 동행하라. 그 길을 혼자 간다고 생각하지 말고, 결코 감당하지 못할 짐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님을 기억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단지 "고난을 견디기만 하라"는 수동적 권면이 아니라, 고난 자체가 새로운 삶과 부활의 소망으로 이끄는 통로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메시지입니다.

성경은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으라"(빌1:29),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딤후2:3)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치셨다"(벧전2:20-21)라고 하며, 고난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길,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길이라고 강조합니다. 사도들은 고난을 피해 달아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고난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길"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골1:24). 장재형목사 역시 이러한 본문들을 근거로, "우리 각자의 삶에서 겪는 모든 형태의 고난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확장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우리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느냐이다"라고 말하곤 합니다.하지만 현실을 보면,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고난 없이 신앙생활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가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의 저주나 심판이라고 보는 시선도 여전합니다. 물론 스스로 무익한 고난을 자초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그 사랑이 무엇인지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고난을 부정하고, 복음 자체를 '고난 없음'으로만 치장하여 전하려고 할 때, 신앙은 천박해지고 사랑은 피상적인 차원에 머무르고 맙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도 조금만 힘든 일이 생겨도 쉽게 등을 돌리거나 원망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그리스도의 핏빛 사랑, 고난을 통해 드러난 진한 희생과 헌신의 사랑이 과연 우리 안에 살아 있는가 돌아보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가벼워지고 천박해진 원인을 "십자가의 고난을 충분히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짚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심판이나 법적 형벌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죄와 맞닥뜨릴 때 보여주신 가장 극적인 형태라는 것입니다. 그는 "고난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하는 시험장"이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이 점을 회복할 때, 즉 고난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가르침을 회복할 때 비로소 진정한 부활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개인적인 죄책감이나 형벌의 차원으로만 해석하는 단편적인 시각을 넘어, 십자가의 희생이 보여주는 감동과 그 희생 속에서 열매 맺는 부활의 영광을 함께 체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지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가 다른 복음서보다 더 길게 기록되어 있는데, 13장부터 16장까지는 예수님의 긴 고별 설교가 담겨 있고, 17장은 고별 기도, 그리고 18장부터는 실제 수난 사건이 전개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고난의 시작점에서 요한이 주목하는 단어는 바로 '사랑'입니다. 즉,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어떤 면에서 '사랑'이 가장 큰 고난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고난을 각오해야만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가르침 중에는 "사랑하지 말라, 애(愛)는 곧 고(苦)다"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집착을 낳는다는 차원에서 그런 결론에 이르는 것이지만, 기독교의 관점은 다릅니다. 참혹한 십자가의 죽음이 예수님께는 가장 극심한 고난이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가장 위대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멀리서 구경하는 태도를 넘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라'고 부름받습니다. 마치 빌립보서 3장 10-11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듯,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으로 부활에 이르려는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본성은 내가 어려움에 처하면 다른 이를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그 상황에서 사랑은 사치처럼 여겨지고, 점점 더 자기연민과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요13:1). 이는 우리로 하여금 "어려운 상황일수록 타자를 위한 사랑은 더욱 필요한 것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자주 인용하며, 특히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셨지만,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셨다"는 구절에 주목합니다. 사람의 마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아가페적인 사랑이 바로 여기서 절정을 이룬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요한복음 13장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려면 마태복음 20장과 누가복음 22장도 함께 보아야 한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이 두 장에는 제자들이 섬김을 받으려고 다투던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사건과 이어지는 맥락입니다. 마태복음 20장 20-23절을 살펴보면,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이라는 말씀으로 응수하시며, 십자가의 잔을 마실 각오가 있냐고 물으십니다.

이 장면에서 열 제자는 그 두 형제를 분노합니다(마20:24). "어떻게 저렇게 교만하게 높은 자리를 요구할 수 있는가?" 하는 분노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권세를 부리는 모습은 세상의 방식"이라며,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중에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라"고 가르치십니다(마20:25-27). 그리고 직접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주려 함이니라"(마20:28)라고 말씀하심으로, 본인의 삶 전체가 바로 섬김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십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언급할 때, "섬김이 말과 행동에서 분리되지 않고 온전히 일치되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우리의 사랑이 입술에만 머무는 순간, 우리는 이미 십자가의 길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설명합니다.누가복음 22장 14-15절을 보면, 예수님이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라고 말씀하시며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만찬 자리에서조차 제자들 사이에는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벌어집니다(눅22:24). 누가는 이를 두고 "저희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고 비교적 노골적으로 기록합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으로써 직접 몸소 '섬김'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역사적 배경이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건을 두고 "제자들은 주님 곁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관점으로 자리를 탐했고, 주님은 그런 제자들을 꾸짖고 끝내 포기하는 대신 오히려 발을 씻겨 주시는 극진한 사랑으로 섬김을 가르치셨다"고 말합니다.

만찬이 막바지로 갈 때, 예수님은 떡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포도주에 대해서도 "이것을 마시라, 이는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마26:28). 이는 십자가 희생의 깊은 의미를 예표하는 상징입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말씀하신 직후에도 제자들은 '서로 누가 더 크냐'는 문제를 놓고 다툼을 벌입니다. 이는 인간의 죄성과 어리석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면서도,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극진한 모습이 더욱 두드러지는 장면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제자들의 다툼 뒤에 담긴 진실에 대해 "결국 인간의 죄성은 마지막 순간,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드라마틱하게 드러나는 순간에도 자기가 높아지려는 욕망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 어둠을 밝히시는 빛이 바로 주님의 섬김이며,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완성된 사랑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고난은 '사랑의 지표'입니다. 고난이 있기에 사랑이 진짜인지가 분별되고, 고난을 통해 사랑이 연단되며 깊어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다툼을 진정시키기 위해 책망하시기보다는, 조용히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물을 대야에 부어 그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요13:4-5). 당시 팔레스타인의 길은 흙먼지가 많았고, 일반적인 신발은 지금의 샌들과 유사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주로 맨발에 가까운 형태로 생활했기 때문에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발이 매우 더러워지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부잣집이라면 종이 집 주인의 손님을 위해 발을 씻겨주는 일이 자연스러웠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주인 되시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제자들은 자신이 '섬김을 받을 자리'에 있다고 착각했으나, 예수님은 그들의 주인이시면서도 종의 자리로 내려가 그들을 섬기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자 "끝까지 사랑하신" 모습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가장 회복해야 하는 사랑의 형태가 바로 이러한 낮아짐의 사랑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말씀을 인용하며, 교회가 겉으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실제론 서로의 발을 씻어주기는커녕, 누가 더 교회에서 인정을 받는지, 누가 더 '신앙이 좋다'는 평가를 받는지 경쟁하는 모습에 대해 깊이 통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 사람의 반응이나 태도와 상관없이 끝까지 책임지려고 하는 마음이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섬김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랑은 고난을 자초합니다. 예수님이 발을 씻겨주셨을 때 제자들은 부끄러움과 동시에 깨달음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다"(요13:14)라고 당부하십니다. 섬김은 곧 사랑의 실천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자기를 낮추어 종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 이런 관점으로 재해석될 필요가 있습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좀 더 편해지고, 인정받고, 높임받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그때마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고난과 섬김을 묵상해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사랑을 갈망한다면, 결국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섬김의 길, 곧 낮아짐의 길이다. 고난을 피하는 순간, 사랑도 멀어지기 쉽다"고 강조합니다.

이렇듯 고난은 사랑을 증명하고, 사랑은 고난 속에서 완성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장면은 결국 십자가의 사랑을 예고합니다. 십자가는 전 우주적인 고난이자 동시에 전 우주적인 사랑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고난에 동참하라'고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교회가 고난을 가르칠 때, 교회는 가볍고 천박한 사랑이 아니라 깊고 진한 희생적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러운 부활에 이르게 되며, 세상은 진정한 교회의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2. 고난에 동참하는 신앙과 교회의 갱신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겉보기에 이는 매우 괴롭고 힘든 길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길이 참된 자유와 기쁨으로 이어집니다. 빌립보서 3장 10-11절에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라"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한 맥락에서 언급하는 것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부활의 권능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동떨어진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더욱 구체적으로 체험되는 능력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역사상 수많은 신앙의 선진들이 고난을 두려워하기보다, 고난을 통해 얻게 되는 영적 유익과 부활의 능력을 확신하며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예컨대 순교자들의 역사는 우리에게 고난의 궁극적인 열매가 무엇인지 강력하게 보여줍니다. 그들은 결코 스스로 고통받기를 원하거나 죽음을 미화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라면 어떤 환난도 두려워하지 않음을 증명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운다"(골1:24)는 바울의 고백도, 교회를 섬기기 위한 희생이 때로 피할 수 없는 고난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고난의 신학이 개인의 영성은 물론 교회의 갱신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강조합니다. "만약 교회가 고난을 기피하고, 아픔을 외면하며, 삶의 무게를 지지 않으려 한다면 그 교회는 이 땅에서 십자가를 증거하지 못하는 공동체가 되고 말 것이다. 교회가 이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길을 과감하게 걸을 수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타협하고, 고난을 쉽게 피해 가려 하면 할수록 교회의 영적 능력은 상실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단지 개인의 신앙 차원을 넘어 교회의 모습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낸다고 할 때, 그것은 구체적인 삶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생기는 갈등, 예수님의 정신에 위배되는 세상 풍조에 맞서서 빚어지는 마찰, 그리고 선한 일을 행하려고 할 때 생기는 반대와 불이익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가정에서, 또는 사회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 살려 할 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작은 십자가'들이 있습니다. 이를 거부하지 않고 기꺼이 지고 갈 때,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에 조금씩이나마 동참하게 됩니다. 동시에 그 길에서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발을 씻기는 사건은 단순한 예절 교육이나 윤리적 가르침을 넘어서는 상징성을 지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요13:15). 이는 서로서로 발을 씻어주는 사랑의 실천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확산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만약 교회 안에서 누가 더 높은 자리, 누가 더 인정받는 자리를 놓고 다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이미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보여준 잘못된 태도를 재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보여주신 길을 좇아야 합니다. 가장 먼저 낮아지는 이가 결국 가장 높아지는 원리, 종말론적 가치관의 전환이 교회 안에 자리 잡을 때 참된 부흥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없이 영광만 바라거나, 무조건 평안과 번영만 구하는 신앙의 자세는 사실상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태도입니다. 성경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7:13)고 말씀합니다. 넓은 문, 편한 길은 우리를 멸망으로 이끈다는 경고가 있습니다. 여기서 좁은 문, 좁은 길은 필연적으로 희생과 고난을 수반합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을 목격한 제자들은 처음에는 그 길을 함께 걷기 두려워 도망쳤지만, 결국 성령의 능력 안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나서는 기꺼이 순교의 길까지 걷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지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귀한 일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교회와 성도들 사이에는 '번영 신학' 혹은 '성공 신학'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어서, 고난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여전합니다. 복 받는 것, 잘되는 것, 건강하고 부유해지는 것만을 축복이라 여기고, 아플 때나 어려울 때는 축복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고난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축복이 임할 수 있음을 여러 차례 강조합니다. 구약의 욥 이야기는 극심한 시련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회복과 배가의 축복을 보여주고, 시편을 비롯한 많은 본문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게 되는 은혜를 증언합니다.

장재형목사는 "고난은 결코 그 자체로 기쁘거나 달콤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고난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달라질 때, 그것은 성숙과 부활의 계기가 된다. 우리가 한 번 더 주님의 마음을 깨닫게 되는 기회가 된다"라고 설파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고난에 대해 바르게 가르칠 때, 성도들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 주님께 뿌리를 깊이 내린 소망,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랑을 놓지 않는 영적 성숙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런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야말로 세상이 보기에도 '가벼운 존재'가 아니라 '진지하고 거룩한 공동체'로 비칠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고난 서사는 "끝까지 사랑하셨다"라는 말로 대표됩니다. 이는 종말까지 사랑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인 사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삶으로 실천할 때, 교회 안에서나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향기가 확산될 것입니다. 사랑으로 인해 초래되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날마다 새로운 힘을 주십니다.

더 나아가 교회의 갱신은 이 '고난에 동참하는 신앙'이 얼마나 공동체 내부에 뿌리내리고 있느냐와 직결됩니다. 만약 교회 내 다툼과 분열, 오해와 갈등이 잦고, 서로를 섬기기보다 자신을 높이는 일에 바쁘다면, 그것은 이미 고난을 회피하려는 태도로 인해 사랑이 식어 버린 결과일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여러 설교에서 "십자가의 길에서 떠나지 말라. 그 길이 외롭고 힘들더라도 성령의 도우심이 있을 때 오히려 우리의 영혼은 그 길에서 자유와 평안을 경험하게 된다"고 자주 강조했습니다. 교회 내에서나 개인의 삶 속에서나, 우리가 고난을 대하는 태도는 곧 사랑을 대하는 태도이며,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결국, 교회가 부활의 영광을 실제로 맛보려면, 십자가 고난을 그저 구경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 안에 참여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주님의 모습을 기억하고, 서로의 발을 씻겨줄 수 있는 작은 실천들을 통해 고난에 참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예배당 안에서의 의식이나 예식이 아니라, 가정과 일상, 그리고 사회 속에서 연약하고 힘든 이들을 섬기고, 자신의 편안함을 내려놓으며, 때로 오해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진리를 지켜내는 과정으로具體化됩니다. 이런 태도는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진짜 교회가 보여야 할 모습이자, 세상이 교회에 기대하는 거룩한 영향력입니다.

요한복음 13장 이하를 차근차근 묵상해보면,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계속 강조됩니다. 17장에 이르면 예수님은 고별 기도를 하시면서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분리되지 않고도 거룩함을 유지하기를 기도하십니다(요17:15-17). 세상 한가운데서,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누리며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해 달라는 강청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어떤 고난이 찾아와도 주님의 사랑에 뿌리를 두고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담대하라'는 명령을 붙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담대함은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에 맞서 싸우라'는 단순한 투지가 아니라, 주님이 이미 고난과 죽음을 이기셨다는 사실에 근거한 믿음의 평안입니다. 고난을 겪으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이유가, 이미 예수님이 승리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 복음적 담대함을 품고 세상 속으로 파송된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 담대함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표지가 바로 '끝까지 사랑하는 섬김의 태도'입니다.

사랑으로 말미암은 고난이야말로 예수님의 삶을 가장 생생하게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택하신 것은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 그 사랑은 말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희생하고 낮추어 섬기려는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 길에 고난이 따른다 해도, 그것을 통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참된 사랑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며, 교회를 피상적인 종교 조직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공동체로 갱신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고난 신학을 두고 "우리를 예수님과 더욱 친밀하게 만드는 통로"라고 부르며, "고난이 깊어질수록 그리스도의 사랑도 더 선명해지고, 우리의 믿음은 새 힘을 얻어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며, 혹은 고난 주간에 특별히 요한복음 13장부터 19장까지를 차근차근 묵상하고,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 고난을 통해 드러났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걸어가신 주님의 섬김을 본받고자 결단해야 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 그리고 십자가에서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던 사랑은 오늘날 교회를 향해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였노라. 이제 너희도 서로의 발을 씻어 주라. 세상에 나가 고난을 피하지 말고, 사랑을 선택하라." 고난을 통해 드러나는 진지하고 진한 사랑이 회복될 때, 교회는 다시 일어나고 세상은 복음의 힘을 새롭게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음을 우리는 확신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순절, 혹은 더 나아가 평생의 신앙 여정 속에서 붙들어야 할 핵심 진리이며, 동시에 장재형목사가 누차 강조하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고난 없이 십자가는 없고, 십자가 없이 부활도 없다"는 사실을 진실로 깨달을 때, 교회는 비로소 초대교회가 누렸던 능력과 감동을 되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의 삶에서도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할 때, 사랑으로부터 오는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온몸으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